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불경기에, 사상최악 취업난에, 도쿄나 런던에 버금가는 고물가에.
숨쉬는 데도 하다못해 마스크 살 돈이 필요한 살기 팍팍한 한국에서 직장을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아직 아기도 없고 남편과 나 둘 다 돈벌이를 하는 동안 경제적으로는 여유로웠다. 늘 시간에 쫒기긴 했지만 그래도 삼겹살 먹고 싶은 날 시간 불문하고 마음껏 먹고 가지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고민없이 누렸지만. 하지만 "경제적인 이유"라는 저 한 가지 이유 말고 이 직장을 다녀야 하는 내 안의 다른 어떤 이유도 결국 찾지 못했다.
마음은 업무와 회사, 동료들에 대한 불평불만으로 가득했고 그럴수록 퇴근 이후의 시간도 각박하고 무료해졌다. 매사에 짜증과 분노의 감정이 일어나고 내 마음속에 어떤 정신적인 여유로움도 남아있지 않았다.
뭐든 바꾸어야 했다. 내 마음가짐을 바꾸던지 아니면 탈출하던지.
건전지는 닳아버렸고 다른 건전지로 교체하면 그만이다. 나는 이곳에서 건전지 그 이상, 그 이하의 의미도 없다. 결국 널려있는 아무 건전지로 교체하면 그만이고, 근본적인 문제는 산적해 둔채로 거대한 톱니바퀴는 계속해서 굴러간다.
내 사표가 '피로스의 승리'라는 말처럼 실제로는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고 상처뿐인 승리인건지, 승리라는 말이 이 상황에 부적합한 것 일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퇴사를 결정하기 전 내 안에서, 그리고 회사 안에서 수많은 전쟁을 치루었고, 그 전쟁터를 뛰쳐나온 나는 폐잔병인지 아니면 자유를 쟁취한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최소한 그 군복은 벗었다. 그리고 어떤 의미로는 승리라고 생각한다.
업무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것이 누구의 득인가라는 문제는 차치해 두고 노동이라는 이름의 반대급부인 월급에 대해 잠시만이라도 집착을 중단하기로 결심했다. 6년간 쉼없이 일했으니 잠깐 쉬어간다고 해도 내 인생이 망가지는 것도 끝없이 추락하는 것도 아니다.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공포는 미뤄두고 쉴 수 있는 지금을 마음껏 즐기자.
사무실 안에서 전화에 치이고 메일에 쫒기면서 시간을 죽이는 대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하늘을 보면서 시간을 채운다. 연약한 줄 알았던 새싹이 얼마나 새파란지, 또 얼마나 강인한지, 길가에 의미없이 피어있던 꽃은 얼마나 붉고 선명한지 새삼 마음이 벅차 오른다.